부모님의 손을 벗어나 내 식탁을 스스로 책임진지도 벌써 9년째지만
어쩐지 스스로를 위해 요리하는 것에는 인색한 편이다.
나 혼자 한 끼 먹자고 재료를 손질하고 양념을 하고 굽고 볶고 하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깝기도 하고,
심지어 먹는 시간보다 준비 시간이 더 긴게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랜 기숙사 생활동안 공용 주방을 쓰거나 개인용 작은 주방에서 간단히 요리해 버릇했던 것도 이런 맘을 갖게 된데 한 몫했다.
하지만 간편한 상차림과 대충 때우는 상차림은 종이 한 장 차이인지
밥과 메인 반찬 하나 또는 파스타 같은 간단한 메뉴 위주의 구성은 탄수화물 위주로만 이루어지기 십상이고
먹기에 간단하다보니 오히려 급히 먹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다 이 마저도 귀찮아지면 인스턴트로 때우곤 했다.
그러다 문득, 대충 때우는 내 식사가 내 인생 같아서
갑자기 처량하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안 그래도 외국에 살면서,
유학한 도시도 아니고 직장때문에 친구도 없는 도시로 이사 와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와서 대충 때우는 이 식사가 오늘 하루 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라니!
고된 삶을 살고 집에 돌아 온 나를 내가 위로하고자 "나를 위한 식탁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집에 있는 재료를 최대한 활용해서 간단하고 맛있고 건강하게.

- 이 프로젝트의 첫번째 메뉴는 지중해식 연어 야채 구이와 따뜻한 두부 미역 샐러드
오븐용 세라믹 그릇을 아주 오랜만에 꺼냈다.
재료는 연어만 구매하고 나머진 집에 있는 야채 냉장고털이.
젤 아래엔 당근과 가지 자투리를 적당히 썰어 깔고
그 위에 연어를 얹은 뒤 레몬을 얇게 썰어서 얹고
시들어가던 파프리카와 양파, 마늘도 편을 내서 수북히 쌓은 후
올리브유 스윽스윽, 트러플 소금, 후추, 오레가노 살짝살짝 뿌려서 오븐에 30분 정도 구웠다.
오븐에서 연어와 야채가 노릇노릇 구워지는 동안 사이드로 따뜻한 두부 미역 샐러드도 만들었는데,
별거 없이 두부와 미역을 데쳐서 맛소금 들기름에 조물조물 무쳤을 뿐인데 건강한 감칠맛이 가득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음식을 즐기는 시간도 여유롭게 갖고 싶어서
화이트 와인을 꺼냈다.
회사를 다녀왔음에도 재미있는 이벤트나 약속이 있지도 않은 평일 저녁임에도
나 자신과 함께하는 제법 괜찮은 시간이었다.
좋은 식사, 좋은 와인, 좋아하는 영화
이 정도면 오늘 저녁은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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