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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말라가의 추억, 빠에야

스페인 여행은 총 두 번이었는데, 2017년에 바르셀로나와 말라가에 다녀왔었다.

 

가우디의 성가족성당부터 구엘 공원 등 멋진 볼거리와

3월 말임에도 뜨거웠던 태양 아래 해변에 앉아 문어, 오징어, 새우 등 여러 종류의 해산물 구이에 청량하게 시원한 화이트와인을 마시며 느린 오후를 즐겼던 바르셀로나도 잊을 수 없지만,

말라가의 그 느린 분위기와 위트, 여유로움이 줬던 위로는 내게 아직도 행복한 추억이다.

 

그 시기의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고 가난했고 고민도 많고 우울했던 시기였는데,

말라가에 살던 친구의 초대로 저가 항공 티켓 한 장과 최소한의 경비로 인생에서 가장 멋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페니의 빠에야 키트로 만든 새우빠에야

 

말라가에 도착하자마자 짐 풀 새도 없이 친구는 나를 빠에야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스페인어로 새까만 먹물 빠에야에 레드와인을 시킨 친구를 경이롭게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이다가 음식을 받았는데

정말 온통 까만 먹물 투성이라 뭐가 해산물인지 뭐가 밥알인지 구분하기도 어렵고

솔직히 맛있을지도 의심되는 비쥬얼이었다.

 

친구는 알리올리 소스를 주문했다며, 이 소스는 신발을 찍어먹어도 맛있다며 날 안심시켰다.

알리올리 소스는 마늘맛 마요네즈 같은 소스인데, 친구 말대로 신발을 찍어먹어도 맛있을만 했다.

 

까만 먹물 빠에야를 내 앞접시에 덜어 알리올리 소스를 비벼 먹으니

분명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익숙한 맛.

먹물 자체는 특별한 맛을 내진 않았고 해물이 잔뜩 들어간 해산물 리조또에 마늘맛 마요네즈를 비벼먹는 기분이랄까.

맛이 없을 수 없었다.

 

이후 여행 내내 하루에 한 끼는 꼭 먹물빠에야에 알리올리 소스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그때의 맛을 잊을 수 없어서 독일에서 빠에야를 하는 스페인 음식점을 찾아다녔지만 먹물 빠에야를 하는 곳은 아직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 힘들었던 내 삶에 도피같은 여행을 떠나,

매일 보는 독일의 회색 도시가 아닌

(안타깝게도 당시 내가 공부하던 도시는 2차 대전 이후 콘크리트로 투박하게 지은 건물이 많은 건조한 회색도시였다.)

빠알간 투우사복을 입은 아저씨들, 파아란 바다, 노랗고 초록초록한 야자수, 빛나는 햇살의 총 천연색 말라가는 내 삶의 한 조각의 행운이었다.

 

그 때의 내 추억과 내 기분이 내가 먹었던 먹물빠에야의 조미료였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내게 빠에야는 특별하다.

사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의 식사일지 모르니까.

 

새우를 잔뜩 넣은 그야말로 새우빠에야

 

얼마전 독일 수퍼에서 일주일 동안 스페인 음식을 판매했는데, 마침 빠에야 키트가 있었다.

샤프란 쌀, 각종 말린 야채와 조미료가 들어있는 키트를 오일에 살짝 볶은 후 끓이고,

따로 새우를 올리브유에 잔뜩 볶아서 올려주었다.

 

아쉽게도 먹물빠에야도 아니고, 맛도 스페인에서 먹는 맛을 따라갈 수 없지만,

내게는 특별한 저녁.